위빠사나 명상 (모곡사야도의 가르침 2)
눈으로 보면서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의 변화를 계속 관찰해야 한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의 무상함을 새겨야 한다.
즐기느 마음을 뒤따라, 무상을 새기는 마음이 서면 즐기는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이 소멸하면 연결할 고리가 없어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다.
즐기는 마음의 생멸을 관찰하라.
앞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뒷마음이 정도의 마음이다.
생멸을 바싹 붙어 관해야 정도가 일어난다.
원인이 소멸 되어야 갈애, 강한 집착, 업이 뒤따를 수 없다.
미순 사람을 보면서 일으킨 성낸 마음의 생멸을 관하라.
정도가 생멸을 밀찰 관찰할 때 눈에서 일어난 인과의 고리가 끊어진다.
탐욕, 진심, 혼미함의 생멸을 관하라.
어떤 마음이건 일어나는 마음과 느낌의 생멸을 관찰하라.
모든 현상의 생멸을 온전히 관찰하면 인과의 고리가 끊어진다.
그렇게 수행할 때 탄생, 늙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건 그 마음의 생멸을 관찰하라
온전히 알아차릴 때 위빠사나 평정이 일어난다.
생멸을 관하는 지혜가 위빠사나 평정이다.
안식 (眼識)이 시각물질을 통해 대상(사물)을 본다. 이식 (耳識)이 청각 물질을 통해 대상 (소리)를 듣는다.
내가 보고, 내가 듣는게 아니다. 보고, 듣고, 먹고, 냄새를 맡고, 가려움을 느끼는 행위중에서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한 톨도 없다. 그저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뿐이다. 어디에도 내 자리란 없다. 실재에 나를 뒤섞지 마라.
난무하는 추측이나 말로 되는게 아니다. 오로지 물질과 정신만 있다. 정신이 명령하면 몸(물질)이 따른다.
관찰하고 관찰하는 순간마다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내 소관으로 만들수 없다. 그저 내 앞에 나타나서 내 앞에서 소멸할 뿐이다. 이렇게 생멸을 거듭 관찰해야 사견에서 번서안 수 있다.
생멸이 고통의 진리 (고성제)다. 생멸을 알아차릴 때 오온의 덩어리가 흩어진다. 오온에서 생멸이 그칠때 고통의 끝, 도지혜가 일어난 것이다.
생멸의 끝, 종착역까지 수행을 놓치지 마라. 생멸의 고통을 치열하게 관하면 어느 순간 끝난다. 고통이 온전히 사라진 고요와 적정에 도지혜가 있다.
행멸이 종결될 때까지 알아차림을 붙들어라. 부디 죽음이 오기전에 수행하라. 너무 늦니는 마라.
오온의 생멸을 바라. 무수한 생멸을 관하면 오온을 혐오하게 된다. 이에 고통을 아는 지혜가 일어난다. 고통의 진리를 무수히 관하면 고통을 원치 않는 지혜가 생겨나 고통을 벗을 수 있다.
어떤 마음이든 일어나면 그저 '마음이 일어났구나'라고 아는 정도만 관찰하라.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단지 생멸하는 구나, 조건에 의해 일어나 사라질 뿐이다. 이 마음은 내가 아니다'를 알아차리라
내것, 내 마음이 아님을 알아차려라.
핵심은 나라는 집착을 떨치는 것이다.
나와 집착을 분리하면 사견은 절로 사라진다.
내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면 갈애도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간다.
어떻게 해야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든,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
오온이 일어난 것 뿐이라고 알아 차리면 사견에서 분리된다.
나를 보지 않고 현재 생멸을 보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나라는 씨앗을 심으면 갈애, 강한 집착, 업이 자란다.
불선 망ㅁ을 증폭시키는 사견이 지옥으로 이끄는 뿌리다.
한 생에서 벌어지는 가난과 부귀에 끄달리지 마라,
가난하다고 비굴하지 말고 부귀하다고 자만하지 마라
지옥수명에 비하면 현생은 분, 초에 불과하다.
겁주련ㄴ게 아니다.
반드시 가야하고 필연적인 종착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남겨진 시간이 참으로 짧다.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자식, 사업 등 세상사에 허비해서야 되겠는가?
생멸을 낱낱이 더 많이 보는 일이 가장 다급하다.
생멸이 그친 곳에 닿으면 할일을 마친 지혜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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